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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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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쾌] 에고이즘 러브 (폴라) 아침 7시 5분. 여느 때와 같이 회승은 눈을 떴다. 매일 아침 직장을 나가는 현대인들에게는 새소리를 모닝콜 삼아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은 사치였다. 애초에 방음이 잘되는 고층빌딩에 사는 한 웬만해선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꾀꼬리같은 울림은 아닐지언정 익숙한 목소리로 회승을 깨우는 임무를 무사히 완수한 훈은, 그가 어기적대며 침대에서 내려온 즉시 이불을 정리하며 분주히 움직였다. 한 치의 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양 손바닥으로 시트 주름을 슥슥 펴는 손길이 반듯했다. 정작 서둘러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은 회승임에도 불구하고 늘 아침시간에는 훈이 더 바빴다. 실제로 회승이 몸을 씻고 나가면 식탁에는 그가 새벽같이 만들어둔 아침식사가 따뜻하게 차려져 있을 터였다. 힐긋, 잠옷을 벗으면서 시선을 뒤로하니 어느..
[학쾌] 오늘도 빛나는 너에게 (포체) 오늘도 빛나는 너에게 김재현 x 유회승 나 졸업은 할 수 있을까... 올해로 대학교 4학년을 맞이한 김재현은 벚꽃길을 걸으며 신이 난 새내기들과 달리 막막하기만 했다. 재현은 사진학과였다. 즉, 졸업을 하기 위해선 졸업 작품을 준비해 동기들과 졸업 전시회를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재현이 원체 자유로운 영혼이란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재현의 실력만큼은 교수님들이던 선후배들, 동기들이던 인정한 실력이었다. 그런 김재현이 왜 이렇게 졸업 작품에 대해 막막해하냐고 물어본다면 답은 간단했다. 주로 인물화를 찍는 재현인데 졸업 작품의 모델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왜냐하면 재현은 모델을 정하고 컨셉을 정하는 등 일단, 모델이 정해져야 일이 진행이 되기 때문이다. 재현이 처음부터 막막했느냐 그건 아니었다. 재현은 본..
[혚쾌] 네가 사는 세상 (솜) 네가 사는 세상 1. 참 구질구질하게 살았다.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뽑아 허기를 달래는 것도, 남들은 잘만 버리는 미지근한 핫팩을 미련하게도 쉽게 버리지 못해 꼭 쥐고 있는 것도, 버린 꽁초를 주워다 피는 것도 모든 게 다 구질구질했고 그게 나였다. 구질 구질과 유회승, 두 단어는 같은 단어라고 지칭해도 무방했다. 살면서 한 번도 따듯하고 환한 아침을 맞이한 적이 기억에 없었다. 어떤 때는 한 사람도 살기 비좁은 작은방 한켠에서 숨어 사느라 그랬고 또 어떤 때는 남들이 꿈을 꾸고 있을 캄캄하고 차가운 새벽에 하루를 시작하느라 그랬다. 슬프다거나 원망 같은 감정을 느끼기엔 날 때부터 그렇게 태어난 유회승은 무력했다. 그저 그렇게 살면서도 또 살아보겠다고, 또 외롭고 쓸쓸한, 아직 해도 뜨지 않는 그 시간에..
[혚쾌] Studio Romance (보리밥) [혚쾌] Studio Romance w. 보리밥 살다보면 모든 게 이상해서, 그저 이상한 대로 톱니바퀴마냥 맞아떨어져 휩쓸리는 순간이 있다. 프로젝트 앨범의 인트로를 구상하다 새벽 4시가 넘도록 공동 작업실에서 단둘이 작업에 몰두하던 날이었다. 그쯤에서 그날 작업을 끝마치기로 한 둘은 지칠대로 지쳐있었고, 소파는 물론 한 개밖에 없었다. 승협이 먼저 소파에 힘 없이 풀썩 누워 좁은 옆자리를 툭툭 치곤 팔을 벌렸다. 말없이 피실 웃은 회승은 느릿느릿 승협의 옆에 누웠다. 아니, 아예 안겼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비좁은 소파에서 둘은 끌어안고 누워 규칙적으로 색색거리는 서로의 숨소리를 꽤 오랫동안 느끼고 있었다. 회승은 그저 피곤한 나머지 미쳤다고만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얼굴을 묻은 자신도, 그대로 ..
[혚쾌] 一片月: 작은 달조각 (무명) 一片月 작은 달조각 ※유혈과 사망 소재가 존재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muPnFdQ6zY 달님, 제 목소리가 들리시나요? 듣고 계신다면, 부디 이 소원을 이뤄주세요. 달이 휘영청 뜬 밤, 달을 제외하곤 그 어떤 빛도 보이지 않는. 하지만 그 유일한 빛으로 온 천지가 밝은 들판에 아직은 앳된 듯, 하지만 그리 어리다고만은 할 수 없는 목소리가 울렸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가릴 것 없는 들판에서도 가장 달이 잘 보이는 곳에 누워 하늘을 정확히는 달을 올려다보고 있는 소년, 회승이었다. 소년에게는 신묘한 힘이라도 있는 듯 그가 손을 휘저을 때마다 그 주위의 바람이 소용돌이치기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지기도 했다. 유일무이한 달과 그 빛에 가려 희미한 자국만을 ..
[뮤쾌] 오색찬란: 오늘도 빛나는 너에게 (도길) 어릴 적 누나가 좋아해서 닳도록 봤던 영화가 있었다. 리모컨 주도권을 빼앗긴 차훈은 사랑에 빠지면 세상이 뒤집어진다는 내용의 그 영화를 감흥 없이 보고 또 봤다. 재미없어. 그럼 가서 공부나 해. 아냐 사실 재밌어. 재밌긴 개뿔 그냥 공부하기 싫어서 티비 옆에 붙어있었던 건데 어느 날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영어로나 한글로나 대사를 외울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 중 한 대사는 특히나 정확하게 외우고 다녔는데, 공부 싫다고 도망갔다가 도리어 암기력만 상승한 웃지 못할 현상에 머리가 좋아서 그렇다고 부친은 기뻐하였으며 누나는 코웃음을 쳤다. 쟤 그냥 저 대사가 마음에 든 거야, 본인이 인정을 못할 뿐이지. 절대 인정할 수 없는 차훈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영화 속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똑똑히 기억한다. “살다보..
[학쾌] Mermaid (달루) 옛날 옛날에, 바다 용왕에게는 일곱 명의 딸이 있었습니다. 막내 인어공주는 성인이 된 생일날, 드디어 바다 밖 세상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 그 날, 배 위에서 열리는 왕자님의 생일파티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인어공주는 왕자님을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갑작스레 불어온 폭풍으로 인해 배가 난파되었고, 왕자님은 바다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인어공주가 왕자님을 구해서 뭍으로 헤엄쳐 간 덕분에 왕자님은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왕자님이 깨어나기도 전에 왕자님을 찾는 다른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고 인어공주는 정체를 들키는 게 무서워 급히 바다 속으로 숨었습니다. 며칠이 지나도록 인어공주는 왕자님이 그리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인어공주는 마녀에게 찾아가서 다리를..
[학쾌] 이상하고 아름다운 (다니) 봄의 시작이었다. 벚꽃 필 무렵이 되면, 우리 가족은 매해 아버지의 고향에 내려가곤 했다 갓 10살을 넘긴 어린 회승은 아버지가 틀어놓은 라디오를 들으며 쌩하니 달리는 차창을 바라봤다. 일정 간격을 두고 빼곡히 심겨진 벚나무에서는 연한 분홍빛의 꽃잎들이 자유로이 날아다녔다. 회승은 이따금 창문에 부딪히는 꽃잎들에 꺄르르 웃으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소리치곤 했다. 아버지! 꽃잎들이 제가 좋은가 봐요. 자꾸 저만 따라다녀요. 아버지는 룸미러에 비친 회승의 상기된 볼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할머니 댁 뒷산에도 아주 큰 벚나무 한 그루가 있단다. 부디 별 탈 없어야 할 텐데.. 당최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회승은 그저 신나있었다. 다음에는 길가에 핀 들꽃들을 ..
[뮤쾌] 열대야 (다니) 내 세상 속에 넌 빛이 되어 온몸이 끈적거렸다. 엊그제가 초여름 같았는데 벌써부터 시작된 열대야에 잠 못 이루는 밤이 길어지고 있었다. 가만히 누워있어도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더위를 타지 않는 편인 훈에게도 올여름은 이상하게 더웠다. 운동을 그만둔 이후로는 자발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기력했다. 불필요한 것에 몸을 움직이고 싶지 않아 가만히 있는 시간이 늘어만 갔다. 고등학교 자퇴라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 수가 늘긴 늘었어도 보편적일 수는 없었다. 자퇴를 하지 않았더라면 평범한 고3 수험생이었을 거다. 모의고사 점수 하나에 울고 웃는, 옆에 있는 친구를 죽도록 질투하고도 다음날이면 그에게 위로받는. 급식 메뉴 하나에 하루의 기분이 좌우되며, 몇 개월 후면 어른이라..
[혚쾌] 빛 (끌페) 01. -우리 헤어져. 훈이 형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내뱉은 말의 무게가 그리 가볍지 않았던 것 치고는 상당히 무미건조한 표정이었다. ..눈은 마주쳐주지도 않고서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내뱉고 커피를 조용히 삼키는 형의 모습은 미동도 없이 잔잔했다. -...왜요? -그냥. 가만히 앉아있는 형의 장단에 맞춰 침묵을 지키려다 겨우 내뱉은 한 마디에, 형은 아무렇지 않게 그냥, 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너무하다고 생각 안 해요?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요, 내가 뭐 잘못했어요? 폭포수같이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질문들을 겨우 삼켜냈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대답해주지 않을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그런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뒤에서 비쳐오는 햇빛에 민트 색으로 물든 형의 머리카락이 반짝, 빛나는 것이 ..